무네요시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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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네요시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와카에 능했으며 묘법원에서 불교 수행을 시작하여 천태좌주에 임명되었다. 겐무 신정 시기에는 다시 천태좌주가 되었지만,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가담하여 시나노 국 오가와라를 거점으로 '시나노노미야'로 불리며 북조와 대립했다. 쇼헤이 잇토 당시 가마쿠라를 점령했으나 패배했고, 이후 요시노로 돌아와 《신요와카슈》를 편찬했다. 사망 장소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며, 1873년 메이지 신정부는 시즈오카 현의 이이노야노미야 분묘를 무네요시 친왕의 능묘로 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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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1년 출생 - 유기 (명나라)
유기는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활약한 정치가, 군사 전략가, 문인으로 주원장의 참모로서 명나라 건국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뛰어난 지략으로 깊은 신임을 받아 '우리의 장량'이라 불렸고, 통치술, 철학, 천문, 지리, 병법 등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중국에서는 신비로운 군사로 숭배받는다. - 1311년 출생 - 슌시 내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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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요시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천태종 승려, 반 막부 세력, 겐코의 난 활약, 요시노 거병 등의 행적을 보였으나,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살해당했다. - 정이대장군 - 모리요시 친왕
모리요시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천태종 승려, 반 막부 세력, 겐코의 난 활약, 요시노 거병 등의 행적을 보였으나,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살해당했다. - 정이대장군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한 가와치 겐지의 무장으로, 아사히 쇼군이라 불렸으나 고시라카와 법황,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대립 끝에 전사했다.
무네요시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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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宗良親王 (무네요시 친왕) |
다른 이름 | 尊澄法親王 (손초호신노) |
로마자 표기 | Munenaga Shinnō |
출생 | 응장 원년 (1311년) |
사망 | 겐추 2년 / 시토쿠 2년 8월 10일 (1385년9월 14일)? |
아버지 | 고다이고 천황 |
어머니 | 니조 다메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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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위 | 묘호인 몬제키 덴다이 자수 나카쓰카사쿄 남조: 세이이타이쇼군 (또는 세이토 쇼군) |
종교 | |
종교 | 불교 |
2. 생애
오초 원년(1311년)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와카 명문가인 니조 가(二条家) 출신으로, 무네요시 친왕은 어린 시절부터 와카에 친숙했다.[1]
쇼추 2년(1325년) 묘호인(妙法院)에 들어가 불교 수행을 시작했으며, 겐토쿠 2년(1330년) 천태좌주(天台座主)에 임명되었다.[1]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다시 천태좌주가 되었으나, 겐무 신정이 붕괴되고 남북조 대립이 본격화되자 환속하여 무네요시(宗良)라 칭하고 야마토 국(나라현) 요시노의 남조 측에서 활약하게 된다.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요시요시 친왕과 함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게 받들어져 이세 국 오미나토(미에현이세시)에서 무쓰 국 레이잔(현 후쿠시마현다테시)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좌초로 인해 도토미 국(시즈오카현 서부)에 표착하여 이가야의 호족 이이 유키나오에게 몸을 의탁한다.
1340년 아시카가 군의 공격으로 이가야 성이 함락되자, 에치고 국 등지를 거쳐 1344년 시나노 국 이나군의 호족에게 초청받아 오가와라에 들어갔다. 이후 1373년까지 약 30년간 이 곳을 거점으로 삼아 "시나노노미야"라고 불렸다.[4]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했을 때 가마쿠라를 점령했고, 1352년 고무라카미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무사시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마쿠라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7][8] 1355년 기쿄가하라에서 북조 측과 결전을 벌였지만 패배하여 남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9] 1369년 간토 간레이의 공격을 받았고, 1374년 결국 쇠퇴를 만회하지 못한 채 요시노로 돌아갔다.[11]
1374년 요시노로 돌아온 후, 남조 측 가인들의 와카를 모아 칙찬 와카집 《신요와카슈(新葉和歌集)》를 편찬했다. 1381년 《신요와카슈》를 조케이 천황에게 바친 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시나노국 오가와라에서 사망했다는 설, 도토미국 이이노야 성에서 사망했다는 설,[12] 시나노 국 이리노야(入野谷)에서 전사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1873년(메이지 6년), 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시즈오카 현의 이이노야노미야 분묘를 무네요시 친왕의 능묘로 공인했다.[13]
2. 1. 어린 시절과 출가
오초 원년(1311년),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와카의 명문가인 니조 가(二条家) 출신으로, 무네요시 친왕은 어린 시절부터 와카에 친숙했다.[1]쇼추 2년(1325년), 묘호인(妙法院)에 들어가 불교 수행을 시작했으며, 겐토쿠 2년(1330년) 천태좌주(天台座主)에 임명되었다.[1]
2. 2. 겐무 신정과 남북조 시대
후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도막]가 성공하고, 건무 신정이 시작되자 다시 천태좌주가 되었으나, 건무 신정이 붕괴되고 남북조 대립이 본격화되자 환속하여 무네요시[宗良]를 칭하고, 야마토 국(나라현) 요시노의 남조 측으로 활약하게 된다.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요시요시 친왕과 함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게 받들어져 이세 국 오미나토(미에현이세시)에서 무쓰 국 레이잔(현 후쿠시마현다테시)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좌초로 인해 도토미 국(시즈오카현 서부)에 표착하여, 이가야의 호족이이 유키나오에게 몸을 의탁한다.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아시카가 측의 고노 모로야스・니키 요시나가 등에게 공격받아 이가야 성이 함락된 후, 에치고 국(니가타현)의 테라토마리(현 니가타현 나가오카시)나, 엣추 국(도야마현)의 호쇼즈 (현 도야마현 이미즈시) 등에 체류한 후, 고코쿠 5년/코에이 3년(1344년)에 시나노 국(나가노현) 이나군의 호족카사카 타카무네(시게노 씨 분파 모치즈키 씨 일족)에게 초청받아, 오가와라(현 나가노현오시카촌)에 들어갔다. 무네요시 친왕은 이 땅을 분추 2년/오안 6년(1373년)까지 약 30년 동안 거점으로 삼아, "시나노노미야"라고 불리게 된다. 그 사이에 고즈케 국이나 무사시 국에도 출진했고, 스가 국(시즈오카현)이나 가이 국(야마나시현)에도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이 『신요와카슈』나 사가집인 『리카슈』의 내용으로 판명되었다.
거점이 된 오가와라는 이나 계곡에 속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가야(이이 씨)에서 도카이 지방으로, 북상하면 하세(후술할 종언의 땅 중 하나)를 경유하여 스와(스와 씨)나 관동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었고, "남조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후의 아키바 가이도의 중심에 위치했다. 때문에 열세가 계속되는 남조 측에게는 최중요 거점이 되었고, 각지에서 패배한 남조 측 무사들(닛타 일문 등)이 도망쳐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
쇼헤이 6년/간오 2년(1351년)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한 쇼헤이 잇토 때, 닛타 요시무네와 함께 가마쿠라를 점령한다. 이듬해 쇼헤이 7년/분와 원년(1352년) 고무라카미 천황으로부터 정의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무사시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마쿠라 점령에 실패하고 에치고에서 재기를 꾀했지만 실패하여 다시 오가와라로 돌아온다. 같은 해,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쿠스노키 마사쓰라 등 남조 세력이 입경하여, 북조의 고곤 천황 등을 감시하에 두자, 고무라카미 천황의 귀경을 지원하기 위해 시나노의 미야카타 세력을 결집하여 출발하려 했지만(『타이헤이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교토를 회복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쇼헤이 10년/분와 4년(1355년) 스와 씨(스와 나오요리)나 스와 신토・니시나 씨 등을 결집하여, 북조 측 시나노 수호 오가사와라 나가모치와 기쿄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패배하여, 유력 씨족의 이반으로 인해 남조의 세력은 대폭 저하된다.
기쿄가하라 전투에 관해서는 스와대사 권축의 가계인 야지마 씨의 "야지마 문서" 등 극소수의 자료에만 기술되어 있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기본 자료인 엔다이랴쿠에는 "시나노에서의 전란"에 관한 기술이 있어, 이 시기에 "도성까지 전해질 정도의 규모의 싸움(또는 전란)"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그 후의 남조 측(나오요리 파를 포함)의 활동이 정체・침체되는 등의 방증으로, 그 싸움이 남조 측의 패배였던 것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오가와라에서 시나노의 미야카타 세력 재건을 꾀했지만, 쇼헤이 24년/오안 2년(1369년) 시나노 수호를 겸하는 간토 간레이우에스기 아사후사의 공격을 받아, 분추 3년/오안 7년(1374년) 쇠퇴를 만회하지 못한 채 36년 만에 요시노로 돌아갔다.
2. 3. 시나노노미야(信濃宮) 시대
1340년 아시카가 군의 고노 모로야스, 니키 요시나가 등의 공격으로 이가야 성이 함락되자, 에치고 국(니가타현) 테라토마리(현 니가타현 나가오카시)나, 엣추 국(도야마현) 호쇼즈 (현 도야마현 이미즈시) 등을 거쳐 1344년 시나노 국(나가노현) 이나군의 호족 카사카 타카무네(시게노 씨 분파 모치즈키 씨 일족)에게 초청받아 오가와라(현 나가노현오시카촌)에 들어갔다.[4]무네요시 친왕은 1373년까지 약 30년간 이 곳을 거점으로 삼아 "시나노노미야"라고 불렸다. 그 사이에 고즈케 국이나 무사시 국에도 출진했고, 스가 국(시즈오카현)이나 가이 국(야마나시현)에도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이 『신요와카슈』나 사가집인 『리카슈』의 내용으로 판명되었다.[5]
거점이 된 오가와라는 이나 계곡에 속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가야(이이 씨)에서 도카이 지방으로, 북상하면 하세(후술할 종언의 땅 중 하나)를 경유하여 스와(스와 씨)나 관동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었고, "남조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후의 아키바 가이도의 중심에 위치했다. 때문에 열세가 계속되는 남조 측에게는 최중요 거점이 되었고, 각지에서 패배한 남조 측 무사들(닛타 일문 등)이 도망쳐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6]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한 쇼헤이 잇토 때 닛타 요시무네 등과 함께 가마쿠라를 점령했다.[7] 이듬해 1352년 고무라카미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무사시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마쿠라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치고에서 재기를 꾀했지만 잘 풀리지 않아 다시 오가와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쿠스노키 마사쓰라 등 남조 세력이 입경하여 북조의 고곤 천황 등을 감시하에 두자, 고무라카미 천황의 귀경을 지원하기 위해 시나노의 미야카타 세력을 결집하여 출발하려 했지만(『타이헤이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교토를 회복하여 실현되지 못했다.[8]
1355년 스와 씨(스와 나오요리)나 스와 신토・니시나 씨 등을 결집하여 북조 측 시나노 수호 오가사와라 나가모치와 기쿄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패배하여, 유력 씨족의 이반으로 인해 남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9]
기쿄가하라 전투에 관해서는 스와대사 권축의 가계인 야지마 씨의 "야지마 문서" 등 극소수의 자료에만 기술되어 있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기본 자료인 엔다이랴쿠에는 "시나노에서의 전란"에 관한 기술이 있어, 이 시기에 "도성까지 전해질 정도의 규모의 싸움(또는 전란)"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그 후의 남조 측(나오요리 파를 포함)의 활동이 정체・침체되는 등의 방증으로, 그 싸움이 남조 측의 패배였던 것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10]
1369년 시나노 수호를 겸하는 간토 간레이우에스기 아사후사의 공격을 받았고, 1374년 결국 쇠퇴를 만회하지 못한 채 36년 만에 요시노로 돌아갔다.[11]
2. 4. 요시노 귀환과 만년
1374년, 36년간의 시나노국 생활을 마치고 요시노로 돌아왔다. 이후 남조 측 가인(歌人)들의 와카를 모아 칙찬 와카집 《신요와카슈(新葉和歌集)》를 편찬했다. 1381년, 《신요와카슈》를 조케이 천황에게 바친 후 행적이 묘연해졌다.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시나노국 오가와라에서 사망했다는 설, 도토미국 이이노야 성에서 사망했다는 설,[12] 시나노 국 이리노야(入野谷)에서 전사했다는 설 등이 있다.
1873년(메이지 6년),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는 시즈오카 현의 이 이이노야노미야 분묘를 무네요시 친왕의 능묘로 공인했다.[13] 나가노 현 오카 촌 오가와라의 부자와(釜沢)에 있는 보협인탑도 무네요시 친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미노국 에나 군(恵那郡) 다카야마(高山, 현 기후현 나카츠가와 시)에도 친왕의 것이라 전하는 무덤이 있다.
3. 평가와 의의
무네요시 친왕은 격동하는 남북조 시대에 남조의 중심인물로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뛰어난 와카 시인으로서, 칙찬 와카집 《신요와카슈》를 편찬하여 와카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생애는 일본 중세사의 혼란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4. 유적과 전설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하마나구 이이사초 이이노야에는 무네요시 친왕의 묘가 있다. 나가노현 오시카촌 오가와라 가마자와에 있는 보협인탑도 무네요시 친왕의 묘로 전해지고 있으며, 나가노현 이나시 하세 시노세(旧入野谷郷)에는 무네요시 친왕의 전사지로 전해지는 곳에 무봉탑이 있다.[5]
5. 계도
(북조)
(남조)
(고세이인노미야가)
(초대 후시미노미야)
(오구라노미야가)
(다마가와노미야가)
(후 스코인)
(후시미노미야가)